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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

참 답답한 프랑스 행정에 길을 잃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할 때마다 나는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받는다. 내가 여기서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의 일정과 계획은 내 삶이 이 나라와 깊은 연관이 생겼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나는 한낯 외국인일 뿐이다. 한 나라의 시스템은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의 역사적 맥락에서 구축된 것이기 때문에 불평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삶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불안감까지 불러일으키는 효율성과 유연함에 대해 큰 의문을 품는다. 매번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특히 올해는 무력감을 느낀다. 비자 갱신 시스템을 모두 온라인 절차로 바꿨기 때문이다. 앞선 경험을 바탕으로 이 곳에서 이런 온라인 시스템은 효율성을 높이는게 아니라 혼란만 불러올 것이라 예.. 더보기
한식 본능이 깨어나다 삼 년 동안 한국에 가지 않았다. 그래도 잘 살았다. 한국 음식을 딱히 찾지도 않고, 마트에서 보이는 대로 식재료를 구해서 잘 해먹었다. 파스타도 잘 먹었고, 치즈도 곧 잘 먹었다. 르방으로 효모빵 만드는 법도 배웠고 피자도 반죽부터 조리한다. 샐러드를 먹어야 끼니를 제대로 떼운 것 같고, 신라면을 먹을 때면 스프가 너무 매워 반만 넣을 정도로 내 입맛은 프랑스인이 다 되었다. 그래도 푹 끓인 김치찌개가 먹고 싶은 순간이 오곤 했다. 고사리와 토란대를 넣어 팔팔 끓인 육개장에 갖 지은 흰쌀밥을 말아먹고 싶은 그런 순간이. 그동안 잘 지냈지만 삼 년째 되니 집에 너무너무너무 가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8월에 한국에 갔다왔다. 첫 주는 부모님댁에서 지냈는데 엄마가 해주시는 집밥으로 몸보신을 제대로 했다. 그.. 더보기
상처받을 준비 한 사람의 삶이 일어나기까지, 회복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지. 어떤 필요를 발견해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어도 응급처치일 때가 많고 진짜 필요와 문제는 건들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제대로 도와주고 싶어서 오늘 하루 더 만나고, 시간을 더 보내고, 친구가 되고 삶의 희로애락이 오간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상처 받는 순간도 생긴다. 상대방이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마음과 생각, 행동과 말 속에 돋아난 가시는 그들을 할퀴고 또한 나를 할퀸다. 가난, 가정 불화, 폭력, 중독, 우울증 등등. 가시의 원인이면서도 가시의 결과이기도 한. 불행은 고리를 만들고 고리는 블랙홀이 되어간다. 한 번 긁히면 생각이 많아진다. 불행의 고리에 갖힌 친구들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 더보기
제네바 구석구석 2016년 12월 26일 아침부터 눈이 부셨다. 커튼 사이로 밝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햇살이다!” 드디어 이불처럼 제네바를 덮고 있던 안개가 완전히 걷힌 것이다. 제네바의 취침이 끝났다. 시내를 돌아다니기에 완벽한 날씨. 오늘 우리의 일정은 제네바 구시가지를 도는 것. 쟌의 어머니께서 우리의 가이드가 되어주시겠다고 했다. “Follow me!” 늘 유쾌하신 쟌의 어머니가 외쳤다. 쟌과 나, 토마스는 어머니의 차에, 마린은 그레이스의 차에 탑승했다. 두 대의 차가 나란히 제네바 중심부를 향해 달렸다. 가는 동안, 쟌은 어머니와 그동안 못 나눈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고 나와 토마스는 창밖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어느새 우리의 차는 제네바 역사박물관 앞 공용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박물관은 반듯한 석조.. 더보기
아무것도 아닌 시간 블로그에 점점 글쓰는 횟수가 낮아진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내 우선순위가 바꼈음을,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아졌음을, 하루하루가 더 즐겁고 유일해졌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정말 할 일이 너무 없어서 스스로 일을 만들지 않으면 절망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나의 답답한 심정과는 달리 유럽에서의 일상은 정말 천천히 갔다. 일이 꼭 있어야 삶에 의미가 생기는 건 아니지 않냐고,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음미라하는 신랑의 말이 이해는 되도 위로로서는 빵점이었다. (지금은 그래. 그 말을 잘 알겠고 가끔 그때가 그립다.) 블로그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베이비시팅이 내 주업인 그 때 블로그라도 해야 자존심이 덜 구겨질 것 같았다. 어떻게든 액티브함을 유지하고 싶었고 나를 개발하고 싶.. 더보기
안녕 2022년! 1월 1일. 나와 신랑은 우리의 특별한 친구를 공항까지 데려다준 뒤 제네바 호수로 향했다. 딱히 계획한 건 아니었는데 집으로 바로 돌아가기는 너무 아쉬웠다. "뭘 하고 싶은데?" "호수가를 산책하는 건 어때?" 새해를 시작하며 평화로운 풍경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걸으며, 얘기하며... 그렇게 새해에 대한 소망과 계획을 나눠보면 어떨까? 공휴일이라 제네바 중심가에 주차하기가 쉬웠다. 평소같았으면 비싼 요금을 내며 제한된 시간에 주차를 해야하지만 빨간 날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안심하고 돌아다녔다. 호수가를 따라 쭉 걷다보니 어느새 제네바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젯또 (jet d'eau)가 나왔다. "가까이 가볼까?" 그러고보니 젯또 아주 가까이에 간 적이 없다. "그럴 리가?! 전에 나랑 한 .. 더보기
크리스마스 마니또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모두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뒀던 선물을 집어들어 부엌으로 모였다. 식탁 중간에 모아 놓으니 산더미였다. 그 주위를 오순도순 둘러 앉으니 그렇게 푸근할 수가. 선물교환의 시간! 쟌의 가족의 크리스마스 전통(?) 중 하나가 마니또이다. 매년 성탄절날 이름을 뽑는다. 일 년 동안 비밀로 해뒀다가 크리스마스 때 그 사람에게 선물을 전달한다. 서로 대단한 선물을 주는 건 아니지만 매년 그렇게 서로를 챙기고, 서로를 생각하고, 서로에게 의미있는 선물을 준비하고 성탄절을 함께 보내는 모습이 감동스러웠다. 게다가 손님으로 온 나와 토마스를 위해 선물을 일일이 준비한 것도 감동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성탄절이 기독교와 함께 자리잡은 휴일이라 그리 긴 전통이나 형식이 없다. 그저 상업.. 더보기
노엘 노엘 크리스마스 당일은 마침 주일이었다. 가족들은 모두 교회에 갈 채비를 마쳤다. 스위스 와서 처음 가보는 교회. 어떤 곳일까? 우리나라처럼 크고 높은 빌딩일까? 몇 명이나 모일까? 찬양팀은 어떨까? 목사님 설교는 어떨까? 많은 것이 궁금했다. 쟌의 가족들과 쟌을 봤을 때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웬지 포근할 것만 같다.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차가 멈춰 섰다. 도착한 것이다. 내리고 보니 농장 한 가운데. 동서남북으로 펼쳐져 있는 푸른 초원. 풀을 뜯고 있는 소들. ‘한겨울에도 이렇게 푸른 풀이 돋아날 수 있구나.’ 바람을 따라 소의 목에 걸린 종이 덩그렁 덩그렁 투박하게 울렸다. 음머 – 풀내음, 소똥냄새, 농기계에 뭍어있는 오일 냄새. 할머니댁이 떠올랐다. “교회가 어디에…?” “여기야, 여기...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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