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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따뜻한 겨울 (2016년 스위스, 프랑스 여행기)

제네바 구석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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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6일

 

아침부터 눈이 부셨다. 커튼 사이로 밝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햇살이다!”

드디어 이불처럼 제네바를 덮고 있던 안개가 완전히 걷힌 것이다. 제네바의 취침이 끝났다. 시내를 돌아다니기에 완벽한 날씨.

오늘 우리의 일정은 제네바 구시가지를 도는 것. 쟌의 어머니께서 우리의 가이드가 되어주시겠다고 했다.

  “Follow me!”

늘 유쾌하신 쟌의 어머니가 외쳤다. 쟌과 나, 토마스는 어머니의 차에, 마린은 그레이스의 차에 탑승했다. 두 대의 차가 나란히 제네바 중심부를 향해 달렸다. 가는 동안, 쟌은 어머니와 그동안 못 나눈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고 나와 토마스는 창밖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어느새 우리의 차는 제네바 역사박물관 앞 공용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박물관은 반듯한 석조건물이었는데 처마 밑의 섬세한 조각상을 하나씩 들여다봐도 하루가 다 갈 것만 같았다.

 

박물관은 아쉽게도 내부수리 중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른 것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분명 아스팔트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단단한 돌바닥이 발바닥으로 느껴졌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돌 길은 우리가 제네바 구시가지에 들어선 것을 알려줬다.

고요히 서 있는 건물들, 빛바랜 벽, 울퉁불퉁한 유리창, 이 유리창을 감싸는 목조 틀, 펄럭이는 제네바 깃발. 골목골목을 지나며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건물들이 인상 깊었다. 이 구시가지는 과거의 추억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누군가의 집이었고, 상점이었고, 제네바 시민들이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곳. 과거이자 현재인 곳. 선조들의 숨결이 묻어있음과 동시에 후세대들의 삶이 이어져가는 곳.

어느새 우리는 쌩피에르 성당에 도착했다. 이 성당은 로마시대부터 자리를 지켜왔는데 현재 형태의 건물은 1160년에 지어졌다. 본래 가톨릭 교회였으나 종교개혁 여파로 프로테스탄 교회로 바뀌었으며 존 칼빈이 설교를 하기도 했다. 칼빈이 앉았던 의자는 교회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쟌의 어머니가 교회 꼭대기까지 올라가볼 수 있게 표를 끊어주셨다. 나선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가며 교회의 건축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는 본당의 천장을 가로질러 계속해서 꼭대기로 올라갔다. 내 기억에 북쪽과 남쪽 탑에 올라갔던 것 같다. 한 사람만 오르내릴 수 있는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한 폭의 그림처럼 벽 중간중간 나있는 창문 밖을 보기도 하며. 창문 너머로 푸른 레만호와 하늘이 맞닿아 있었다.

 

마침내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그 장관이란! 이런 풍경들을 일상으로 보고 사는 이곳 사람들의 정서는 어떨까? 갑자기 아니, 비로소 쟌이 유럽 사람으로 보였다. 제네바 풍경을 뒤로하고 서있는 쟌의 모습은 너무나 완벽했다.

 

보초병들이 지냈다던 탑으로 갔다. 세계2차대전 때도 국경 감시를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 화장실을 보고 놀랐는데 변기모양이 현대식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커버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쪼그려 앉아 볼일을 보는 동안 이곳 사람들은 편안히 앉아 큰 일을 치렀다는 게 놀라웠다.

 

칼빈이 매주 설교했던 채플실 / 울고있는 예레미야 상 / 칼빈의 의자
경비병들이 썼던 변기 / 벽돌마다 다르게 새겨진 문양. 건축 당시 삯을 지불받기 위해 본인만의 문양을 새겨넣었다고.

 

 

 

교회 구석구석 돌아본 뒤 종교개혁 기념공원으로 갔다. 제네바 대학교 뒷마당으로 이어져있는 공원이었다. 이 대학교 도서관 지하에는 고문서 서가가 있다. 열람하고자 하는 도서가 있다면 열람을 신청해야하고, 최소 30분을 기다려 사서로부터 전달받게 된다. 고서 대출은 불가. 아무튼, 개혁 기념비가 저 멀리서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100미터에 달하는 아이보리색 벽에는 종교개혁의 역사가 간략하게 새겨져 있었다. 중심에는 5미터 높이의 네 석상이 우뚝 서 있었다. 윌리엄 파렐, 쟌 칼빈, 테오도르 베제, 쟌 녹스였다. 그들의 손은 각각 다르게 조각되어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찬찬히 석상을 들여다봤다. 하늘은 짙은 푸른색으로 변하며 석상의 근엄함을 더했다.

 

 

 

칼빈이 세운 학교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수업이 진행된다. 그레이스와 마린은 심지어 이 학교 출신. 공교육을 따르는 공립 고등학교다. 칼빈의 종교개혁 정신은 빠졌지만 이곳의 역사는 계속 이어져가고 있다.

 

종교개혁기념비가 알려주듯 제네바는 종교개혁과 아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예를 들어, 구시가지의 오래된 집을 살펴보면 기존 건물에 덧대어 만든 듯한 꼭대기층이 종종 보인다.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극심할 때 제네바로 피난 온 프로테스탄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한 층을 더 쌓아 올린 것이다. 쌩 피에르 성당의 경우에도 종교개혁의 영향을 확연히 볼 수 있다. 본래 가톨릭 성당이었기 때문에 성물과 장식들이 본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이 예배당을 차지하게 됐고 본당 내 장식들을 우상, 사치로 간주하여 다 제거했다. 그렇게 본당은 매우 간소한 형식을 지니게 됐다. 다만, 본당 옆 아주 작은 예배당은 손을 대지 않았다. 이곳에 가면 본당과 굉장히 대비되는 화려한 천장, 창문의 그림들을 볼 수 있다.

 

 

 

종교개혁 역사 말고도 제네바에는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세상에서 제일 긴 벤치, 세금낼 날을 알려주는 나무, 태양 시계, 아직도 작동하는 대포, 건물 사이에 나있는 돌계단, 장 장크 루소의 집, 시장이 꼭대기에 있는 본인 사무실까지 말을 타고 갈 수 있도록 고안된 시청 오르막 등등.

 

12월 31일은 제네바가 하나의 정부로 존재하다가 스위스로 편입한 날이다. 그래서 이 날은 제네바 국경일로 아침 6시에 대포를 발사하는 행사를 한다. 이 날 일어날 수 있을까? 행사에 가보고 싶은데 기상 시간이 마음에 걸린다.

 

제네바. 이 아름다운 도시를 떠나는 발걸음이 더디다. 오늘 밤 꿈 속에서 나는 제네바를 한 없이 걷고 또 걷고 있으리라.

 

12번 트램을 타면 Parc des Bastions에서 바로 앞에서 내릴 수 있다. 종교개혁 공원에서부터 시작해 제네바 구시가지를 돌아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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