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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따뜻한 겨울 (2016년 스위스, 프랑스 여행기)

늦었지만 에스칼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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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3일 저녁

 

 

따뜻한 수프, 치즈, 빵. 속이 따뜻하니 잠 잘오게 해주는 저녁.

 

 

저녁을 다 먹고 테이블을 치웠다. 쟌의 어머니가 예쁘게 생긴 단지 하나를 테이블 중앙에 놓았다. 초콜릿 냄비라고 했다.

“우리 에스칼라드를 기념할 거야! 에스칼라드가 어떤 날인지 기억나?”

쟌이 물었다.

“음…으응?”

쟌이 전에 설명을 해준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났다.

“제네바에서 가장 중요한 날인데! 이 날이 없었으면 제네바도 없었다……. 프랑스의 사보아군대가 칠흑 같은 한밤 중에 제네바를 정복하러 왔는데 제네바 시민들이 모두 용감하게 싸워서 승리한 날이야.”

“한 아주머니는 끓는 수프 냄비를 통째로 적군 머리 위에 내던졌어. 이 이야기에서 초콜릿 냄비 부수는 전통이 생겼어.”

“초콜릿 냄비는 최연장자랑 최연소자가 손을 맞잡고 부숴야 돼.”

가족들이 돌아가며 열심히 설명해줬다.

에스칼라드는 제네바에서 규모가 가장 큰 축제다. 제네바 전체가 이 축제를 위해 일 년을 살아왔나 싶을 만큼 성대하다고 한다. 12월 첫 번째 주말에는 에스칼라드 기념 마라톤이 있고 두 번째 주말에는 거리 퍼레이드와 각종 행사가 금요일부터 주일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한참 늦게 제네바에 왔기에 축제를 보지 못했다. 쟌의 가족은 그런 우리들을 위해 초콜릿 단지를 지금껏 보관해뒀다.

칠흑 같은 한밤 중에 몰래 쳐들어온 프랑스 사보아 군대. 당시 제네바는 프로테스탄트권이었고 프랑스 사보아 지역은 가톨릭권이었다. 이 두 지역은 이웃하고 있는데 사보아의 영주가 제네바를 침략해 가톨릭 권으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갑옷으로 무장한 사보아 군대는 아주 긴 사다리를 들고 와 높다란 제네바 성벽을 쥐처럼 오르기 시작한다. 군대의 규모는 제네바 군대가 무찌르기 힘들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한 전투였다. 그러나 영주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제네바 지형과 시민들의 용기였다. 제네바에는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길부터 해서 수많은 골목들이 있었다. 그래서 사보아 군대가 성벽을 타고 들어왔을 때 제네바 군인들과 시민들은 이 골목길을 따라 요리조리 다니며 사보아군을 교란시켰다. 남녀 할 것 없이 시민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싸웠다.

“오늘은 너랑 아빠가 초콜릿 냄비를 부셔야겠다.”

나이를 계산해보니 내가 최연소자였다. 나는 쟌의 아버지와 손을 맞잡았다.

“냄비를 부수기 전에 구호를 외쳐야 돼. Ainsi périrent les ennemis de la République! (그러므로 공화국의 적들은 죽었다!) 준비됐어?"

“안씨 페리 레 제네미… 드… 라… 레퍼블릭!”

 

 

 

쟌의 아버지와 나는 손을 맞잡고 천천히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맞잡은 주먹으로 냄비를 쾅 내리쳤다. 냄비가 부서지면서 안에 있던 사탕과 젤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탕 봉지를 양쪽으로 잡아당기자 팡! 하고 작은 폭죽이 터졌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 지켰을 전통. 오늘 또 한 번 기억 속에 새기는 역사의 한 장면. 역사와 전통을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들. 이들이 초콜릿 냄비 부서뜨리기를 멈추지 않는 한 승리의 함성은 계속해서 울려 퍼질 테지.

 


 

2019년 12월 7일 에스칼라드 퍼레이드

쟌의 가족과 미니(?) 에스칼라드를 축하하고 3년 뒤. 저는 제네바에서 에스칼라드 퍼레이드를 직접 목격하게 됩니다!

 

 

저는 제네바 사람도 아닌데 가슴 뜨거워지는 거 있죠! '역사는 이렇게 체험되어야 하는거구나. 체험되면 간직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주말 내내 프로그램이 돌아갔어요. 악단 연주, 대포 발사, 그 당시 사용했던 총 사격 시범 등등 볼거리가 시간마다 있었고 뱅쇼와 군것질거리,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판대를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인상 깊었던 건 행사 스텝들이 모두 전통복장을 하고 있었어요. 음식 판매하시는 분도, 퍼레이드 하시는 분도, 안내하시는 분도. 전통복장하고 그냥 길 걸어다니는 분들도 많았어요. 그게 그분들 역할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역사 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을 만끽하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 같았어요. 게다가 제네바 구시가지는 진짜 옛날 건물들 그대로 있고 돌바닥도 그대로여서 타임머신 타고 온 것 같더라구요. 이런거 너무좋아하는 저 >_< 진짜 좋아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행사는 '콤파니 드 1602'라는 단체가 매년 주관합니다. 제네바의 시민들이 자원해서 스텝인원이 채워지게 되는데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연령대가 다양합니다. 그래서 아무나 스텝이 될 수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네바 시민이어야 하고 해마다 책임감 있게 행사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역할도 더 비중있는 걸로 맡게 된다고 하네요. 행사 비용은 음식과 기념품 판매, 모금 등을 통해 충당합니다. (그래서 행사 기간 동안 모금함 들고다니는 분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행사에 감격하기도 했지만 자원정신과 본인들의 역사를 이어가려고 하는 제네바 시민들의 사고방식에 충격을 많이 먹었네요. 

 

 

퍼레이드의 하이라이트! 활활 지핀 불에 군중의 함성과 노래소리! 잊을 수 없는 밤

 

 

 

 

 

에스칼라드 초콜릿 냄비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프랑스어로는 Marmite 마미트라고 부릅니다. 12월이 되면 미그로나 쿱에서 팔구요, 동네 불랑제리에서는 수제 마미트를 만들어 팝니다. 

작년은 정말 아쉬운 해였어요. 에스칼라드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팬데믹으로 취소됐거든요 ㅠㅠ 가족들이랑 다 모일 수도 없었던 게 모임 인원 제약이 있었어요. 그래서 시부모님이랑 저희 부부 넷이서 소박하게 초콜릿냄비 깨먹었네요.

올해는 에스칼라드를 기념할 수 있을까요? 올해 행사가 열린다면 신랑이랑 마라톤 참가를 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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