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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따뜻한 겨울 (2016년 스위스, 프랑스 여행기)

학교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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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교 구경해볼래?”

학교에 무슨 볼거리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볼거리가 참 많았다. 학생들의 연구과정을 담은 프린트물, 연구 관련 기사, 실험 모형, 공지사항과 학교생활과 관련된 알림 및 학생을 위한 행사 전단이 벽면 여기저기를 채우고 있었다. 비어있는 벽이 거의 없었다. 학습이 교실에 정체되어 있지 않고 학교 모든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도서관에 가보자! 내가 쓴 논문이 아직 있을거야!”

“응? 여기 고등학교라고 하지 않았어? 무슨 논문?”

“음……, 그게 스위스는 학교 시스템이 달라서 뭐라고 할까… 학사와 석사 그 중간 단계쯤의 논문?”

스위스는 독특한 교육 시스템을 갖고 있는데 거기에다가 칸톤마다 정책이 달라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래그래. 고등학교에서 자신의 '학사와 석사 그 중간쯤’에 쓴 논문을 보여준다는 데서 벌써 복잡하게 들린다. 쟌이 초등학교 과정부터 쭉 설명을 해줬는데 나도 토마스도 한 번에 못 알아들어서 쟌은 설명을 반복해야 했다. (그럼에도 아직 이해 다 못한 1인)

스위스의 교육과정은 3차 교육과정이다. 1차는 우리나라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프리메흐primaire 과정으로 (스위스는 4개의 공용어를 쓴다는 점을 기억하라. 필자는 프랑스어로 표기했다) 만 4-12세를 대상으로 한다. 중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세콘데흐 엉secondaire I은 만 12-15세를 대상으로 한다. 여기까지가 의무교육이다. 고등과정에 해당하는 세콘데흐 두secondaire II는 직업전문학교와 일반학교로 과정이 나뉘며 본인의 성적과 희망사항에 따라 진학할 수 있다. 일반 학교는 또 다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일반과정과 특화과정이다. 일반과정은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과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고 졸업하여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특화과정은 우리나라의 특목고와 비슷하다. 한 분야의 전문성을 더 빠르고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3년의 수학이 끝나면 대학과정을 바로 연계해 공부를 이어갈 수 있다.

그러니까, 쟌은 이 특화과정을 밟았다. 쟌은 세콘데흐 두를 시작할 때 산업공학분야로 들어갔다. 그래서 화학과 기계공학, 물리, 전기, 컴퓨터공학 쪽으로 공부를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가 3학년 때 해당 대학과정이 갑작스럽게 없어져서 전공분야 뿐만 아니라 학교를 옮겨야했다. 그렇게 간 곳이 농과 고등 •대학이다. 물론 이과생이 문과계열로 옮겨간 케이스는 아니지만 학교의 일방적인 통보에 쟌의 진로가 좌절됐고 또 과학 베이스가 많이 달라 오래 방황했다고 한다. 쟌이 애초에 농공학을 생각했더라면 세콘데흐 두 과정 때 원예, 농화학, 농생물학 쪽으로 공부를 했었을 것이다. 인생이 참 원하는 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도서관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굉장히 소박했다. 찬찬히 둘러보니 농업과 관련된 책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도서 분류도 정원, 채소, 나무, 농업경제 등등 농학의 하위분류를 따라 되어 있었다. 이 학교는 누가 봐도 농과계열이 확실하다.

“봉수와흐!”

쟌이 도서관 사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이 학교 졸업생인데요, 제가 쓴 논문을 볼 수 있을까요?”

사서는 쟌이 몇 회 졸업생이고 논문 제목이 뭔지 묻더니 아카이브로 사라졌다. 한 참 뒤에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는 두껍게 제본한 논문이 한 권 들려있었다.

“와! 이게 쟌이 쓴 논문이라고?”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두께에 압도되었고 레퍼런스에 압도되었다. 101페이지짜리 졸업논문을 위해 58개의 문헌을 참조했다니. 스위스에서 노력 점수란 없으며 논문이 불합격되면 그렇게 공부도 끝이 난다.

“스위스 사람들은 대학 졸업할 때 다 논문을 이렇게 써?”

“응. 마린도 간호학과 졸업할 때 논문 썼어.”

한국도 그런가? 독학사를 한 나로서는 비교할만한 경험이 없다. 혼자 공부를 해냈다는 성취감은 있지만 학문적으로 늘 아쉬움이 남는 나의 지난 공부들. 그나마 대학원에 들어가 그 갈증을 해소하고 있어 다행이고 감사하다. 게다가 쟌과 토마스같이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방학이라 학교는 매우 조용했다. 아주 가끔 학생들과 마주쳤다. 아주 앳된 얼굴에 놀랐다. 서양사람들은 마의 16세를 지나며 폭삭 늙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헝클어진 머리에 빛나는 눈망울을 하고 친구와 열심히 대화하고 있었다. 책상 앞에 책이 잔뜩 늘어져 있는 걸 보니 토론을 하는가 보다.

학교 밖에는 널따란 정원이 있었다. 섹션이 나눠져 있고 식물이 종류별로 심겨 있었다. 쟌이 앞장서서 가며 ‘이건 페튜니아 밭이다, 장미 밭이다’ 설명을 해줬다. 구술 시험 때 교수님이 랜덤으로 밭을 골라 ‘이 식물의 학명과 특징, 재배법을 설명해보아라’ 같은 질문을 한단다. 지금은 겨울이라 볼 게 거의 없지만 꽃이 활짝 피고 식물이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계절, 식은땀 삐질 흘리며 이곳을 거닐었을 학생들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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