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히 아침식사를 끝마칠 쯤에 쟌이 물었다.
"오늘 우리 바다 보러 갈까?"
스위스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라면... 국경을 넘어서 프랑스, 혹은 이탈리아까지 가자는 건가?
"거기가 어디야?"
"가보면 알아. 아주 넓고 새하얀 바다야. 너 새하얀 바다 본 적 있어?"
푸른 바다 말고, 새하얀 바다라니. 물에서 짠맛 나는 그 바다를 말하는 거냐고 물어 보니 웃는다.
"정말 아름다운 바다가 제네바에 있어. 새하얀 바다가 드넓게 펼쳐 있다고!"
아침부터 수수께끼가 줄을 잇는다.
유머와 퀴즈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오자마자 나를 시험할 정도로 좋아한단 말이야?
별의 별 생각을 다 하고 있는 중에 어머니가 한 수 거드신다.
"오! 하얀 바다를 보러 간다고? 정말 좋은 생각이구나. 아름다운 추억 쌓고 오렴."
준비를 하고 내려가보니 쟌과 마린이 기다리고 있다. 바다를 보러 가자는 사람 치고는 쟌과 마린의 옷차림이 간소하다. 두툼한 자켓을 걸치고 끝. 마린은 작은 가방 하나만 덜렁 들고 있다. 차에 네 명이 올라탔다. 쟌이 열심히 기어를 올리며 운전을 한다. 그러고 보니 스위스의 차들은 대부분 수동이다. 남녀 노소 상관없이 열심히 클러치를 밟았다 떼며 운전을 한다. 주관적인 생각이긴 하겠지만, 쟌의 말에 의하면 스위스 사람들은 "자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기계가 대신 하게 한다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라나. 그러고 보니 그 흔한 네비게이션을 달고 다니는 차도 없다. 필요할 때마다 잠깐 보고 다시 커버를 씌워 어딘가 고이 모셔놓던가 아니면 네비게이션 자체도 갖고 있지 않아 폰으로 잠깐 길을 참고할 뿐이다.
한 15분 달렸을까.
"뭔가 차이점이 보여? 우리 방금 스위스 국경을 넘었어! 여기는 프랑스야!"
프랑스라니. 국경을 넘는 게 강남에서 강북을 넘어가는 수준이다. 그날은 심지어 경찰들도 없어서 정말이지 '휙-'하고 국경을 넘었다.
프랑스가 이리 가까우니 바다까지 금방 가려나. 지리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제네바에서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바다까지는 대략 4시간 반. 남프랑스에 위치한 마르세유로 향하든 이탈리아의 사보나를 향하든 마찬가지. 그런데 부지런하게 달려도 시원찮을 판에 차가 산으로 간다. 아무 정보도 경험도 없으니 그저 속으로만 '우리 바다로 가는 거 맞긴 한 건가?' 생각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산 중턱에 섰다.
"거의 다 왔어! 곧 하얀 바다를 보게 될 거야."
그렇군. 장난이었군! 나는 토마스와 마주보고서 '당했다'는 표정을 함께 지으며 웃었다.
"어어, 진짜 하얀 바다를 보게 될 거라니까."
이보게, 친구.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눈 덮인 산 말고 보이는 게 없는걸. 내 귀도, 코도 그 어떤 감각기관도 바다를 읽어 내지 않고 있다고.
그러나 언덕을 오르며 서서히 내 눈 속에 들어오는 그 풍경은...!
우리는 제네바 분지를 가득 덮은 안개를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고 섰다.
살레브산 (Le Salève) 중턱으로 고요와 평온이 잔잔히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저 하얀 바다 위에 작은 배 하나를 띄워 놓으면 그 고요와 평온의 중심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아름다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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