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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따뜻한 겨울 (2016년 스위스, 프랑스 여행기)

제네바의 모든 것은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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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년만의 "따뜻한 겨울" 에세이 컴백.


2016년 12월 23일

 

쟌과 토마스, 나 셋이서 시내 구경을 나섰다. 쟌은 들떠보였다. 우리들에게 자신이 자라온 곳 구석구석 보여줄 생각에 신이 났나보다. 나도 한껏 들떴다. 쟌이 수도없이 디뎠을 제네바 거리를 걸어본다는 사실에.

 

 

고전과 현대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제네바. 나이가 몇 세기나 될까 싶은 건물들을 한참 따라가다가 기술과학대 건물에 설치되어 있는 특별한 시계를 보며 제네바 속에 탄탄히 자리 잡은 문명의 근육을 실감해본다. 시간을 문장으로 알려주는 시계로 콘크리트 건물과 잘 어울리기까지 하여 세련된 미적 감각도 돋보인다. 한편, 우아한 석조 건물 밑에 자리하고 있는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는 왠지 제네바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어딜 가나 똑같은 글로벌 체인이 이 고고한 도시에까지 스며들어야 하나 싶은 의문이 들어서일까.

 

 

 

마트에 들렀다. 미그로 (Migros 정확하게 발음하자면 미그호가 맞다)라는 스위스 마트 체인이었다. 창립자는 스위스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키고 싶었다. 시장 경쟁력이 약한 시골 지역에도 마트를 열고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제품을 공급하고자 했다. 스위스 곳곳에 미그로가 들어섰다. 미그로 뷰제 (Migros budget)제품은 다 똑같은 초록색 디자인에 매력적이진 않지만 알찬 내구성으로 저소득층에게까지 좋은 제품을 공급하도록 노력했다. 소비자의 건강을 고려해 주류와 담배류는 비치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이었던 창립자를 통해 믿음이 어떻게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마트에 들어가자마자 나를 압도한 건 치즈코너. 마트는 이마트 24같이 축소된 규모였는데도 한 벽면 전체가 치즈 및 요거트코너였다. 싸고 맛있어 보이는 피자가 걸려있는 인스턴트 식품 코너도 놀라웠다. 치즈, 요거트, 피자가 흔한 스위스. 꿈만 같았다.

 

우리는 역사가 깊은 제네바대학을 지나 씨멘티에 데 로와 Cimentière des Rois (왕들의 묘지;  Plainpalais 혹은 Pantheon genevois라고도 한다)에 도착했다. 15세기에 지어진 곳으로 제네바에서 가장 오래된 묘지였다. 제네바에 큰 공헌을 남긴 이들이 잠든 곳으로, 죽어서도 제네바의 역사를 증언 하구나 싶었다.

한국에 있을 때 묘지는 물론이고 장례식에도 갈 기회가 별로 없었던 내가 제네바까지 와서 무덤을 둘러보고 있을 줄이야. 그러나 묘지를 둘러보며 쟌이 왜 이곳에 우리를 데려오고 싶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죽음이 건네는 이야기들이 참 많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예술로 승화시켜놓은 이곳은 다방면으로 묵상의 길을 열어줬다. 비통하게 울고 있는 석상,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는 손, 나를 비추는 거울 ……. 물음표 모양의 벤치가 암시하듯 죽음은 우리에게 삶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가치를 위해 살고 있는지 …….

     

 

 

 

 

 

제네바의 모든 것은 말을 한다. 그것이 설령 죽음이라 할지라도.

 

스위스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많이 무지한데, 어째 내가 아는 사람이 딱 하나 있긴 했다. 바로 존 칼빈. 나는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 앞으로 다가갔다. (진짜 무덤의 위치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우어어어어-”

괴상한 소리가 얼핏 들렸다. 발바닥에 어떤 진동까지 감지됐다.

“뭐야? 너도 들었어? 나만 들은 거 아니지? 게다가 땅이 움직여! 이상해!”

쟌과 토마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진동도. 내가 묘지를 너무 오래 둘러봐서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건가?

“쉿- 조용히 해봐! 소리가 다시 나는 것 같은데-”

우리 셋은 숨을 잔뜩 죽이고 괴상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내려 애썼다. 그곳은 내가 발 딛고 서있는 곳, 칼빈의 무덤 앞이었다! 웅크리고 앉아 관찰해보니 땅에 묻어둔 뭔가가 심장처럼 쿵쿵 뛰며 괴성을 내고 있었다. 칼빈의 정신은 아직 살아있다는 인상을 주고싶었나보다. 기발한 설정이긴 한데, 어째 으스스하다.

 

 

 

 

 

 

묘지를 빠져나오는 길에 미슬토나무를 보았다.

“미슬토나무 아래에 서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

쟌이 묻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되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내 볼에 뽀뽀를 해주는 쟌. 아- 미슬토나무와 크리스마스, 그리고 키스. 해리포터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얼굴이 왜 이렇게 화끈거릴까.

 

 

 

 

 


 

안녕하세요, 프스코댁입니다.

이 글은 2016년 저의 첫 스위스 여행 일기를 그때 찍어둔 사진과 함께 복원한 것입니다.

등장인물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그 때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제가 찍어둔 사진 속의 거리를 자주 걷게 될 줄은.

그리고 씨멘티에 데 로와에 다시 한 번 간 적이 있어요. 낙엽 지는 가을이었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조깅도 하고 벤치에 앉아서 쉬거나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저랑 쟌은 벤치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진 속의 "물음표 벤치"에서요 ^^

지금은 마을 곳곳에 있는 공동묘지가 주민들에게는 휴식처로 사용되는 공원인 것을 잘 알지만 2016년에는 엄청난 문화충격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쟌이 제네바 구경시켜준답시고 처음 데리고 간 곳이 무덤이었는데 제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쟌이 표준 인간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똘끼가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같이 살아보니 더 그렇습니다.) 지금은 저도 조카 데리고 산책하고 그러지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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