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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따뜻한 겨울 (2016년 스위스, 프랑스 여행기)

이게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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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스위스 뿐만 아니라 많은 유럽인에게 굉장히 특별하고 중요한 시즌이다. 크리스마스를 위해 일년을 살았다고 할 정도라니.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부모님댁으로, 친척 집으로 모여든다. 우리나라로 치면 설 명절인 셈. 스위스와 프랑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와 새해에 걸쳐 보통 일주일, 길게는 10일 정도의휴가를 낸다.

 

쟌의 가족에게 ‘성탄절날이면 매번 가족들이 다 모였냐’고 물어봤다. 마린은 딱 한 번 빼고는 그렇다고 했다. 쟌이 타국에서 NGO일을 하던 때였는데, 부모님이 쟌을 만나러 가셨다고 했다. 쟌도 그 때를 빼고는 크리스마스면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왔다고.

 

“모이면 보통 뭘 하고 시간을 보내나요?”

 

쟌의 집은 전통적으로(?) 마니또를 했단다. 선물을 교환하고 나면 제비뽑기를 해서 다음 년도 마니또를 선정한다고. 집에서 함께 영화를 보기도 하고 얘기 나누며 조용한 휴식을 취한다고 했다.

 

그러나 성탄전야는 또 다른 얘기다. 홀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하는 이웃이나 난민을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제네바는 정부 차원에서 난민을 지속적으로 수용해왔고 이들을 돕는 자원봉사자들, 단체들이 참 많다. 쟌의 어머니도 10년 넘게 난민 관련 일을 하고 계셨다. 그럼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는?

“많은 손님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했단다. 네가피아노를 잘 치니 몇 곡 들려줄 수 있겠니?”

 

어머니는 테이블 위로 엄청난 양의 음식들을 늘여놓으며 내게 부탁하셨다. 망설이지도 않고 그러겠다고 했다. 늘 마음은 음악가인 내가 이런 부탁에 주저할 리가.

아침부터 이브 파티 준비가 한창이었다. 응접실 꾸미기, 음식 준비, 선물 포장 등등 가족들 모두 역할을 하나씩 도맡았다. 나도 한 손 거들었다. 20인분의 음식이었는데도 분담해서 일하니 금방이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생각나는데 스위스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이번 이브 만찬은 전과 다른 매력이 있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시리아와 이란에서 도피한 난민들, 게릴라 전투부대 소속이었던 이란 아저씨, 이 아저씨 집에 머무는 필리핀 여행객, 터키에서 온 모자, 제네바에서 일을 하고 있는 싱가포르 아가씨, 나, 그리고 토마스까지 해서 각 나라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품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이다.

 

초인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응접실은 20명의 사람들로 꽉 찼다. 우리의 크리스마스 만찬은 흥겹게 진행됐다. 다만 나는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할지 몰라 내내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난민, 이슬람, 게릴라 전투, 시리아와 이란의 정세…… 그 어느 것 하나 쉽게 시작할 수 없는 화제였다. 아는 바도 없었다.

 

이브인 만큼 쟌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예수 탄생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죄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신이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이야기.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구유에 누이시고 양을 치던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에게 경배받으셨다는 이야기. 휘황찬란한 별과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그의 탄생을 증거했다는 이야기.

 

이어 쟌의 아버지가 스피치를 하셨다. 아버지 앞에는 다양한 크기와 색깔의 초가 놓여져 있었다. 아버지는 하얗고 커다란 초에 불을 먼저 밝히셨다. 다른 초들은 모두 이 첫 번째 초로부터 불을 옮겨받았다. 기다란 초, 작은 초, 아름답게 장식된 초…… 하얀 초와 이어 밝힌 초들 모두 환하게 타올랐다. 스파클라도 있었다. 스파클라는 그 어느 초보다도 화려하게 타올랐으나 불꽃이 금방 소멸됐다. 하얀 초에 심지를 갖다댔으나 타오르지 않는 초도 있었다. 마치 하얀 초를 거부하는 것처럼.

 

아버지는 초의 의미를 설명해주셨다. 각각의 초는 우리의 인생에 대한 비유다. 기다란 초처럼 인생의 연수가 많이 남은 젊은이, 짧은 초처럼 인생의 끝을 내다보는 늙은이. 검고 두꺼운 초는 정치인과 같은 권력자, 장식이 화려한 초는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유명인들, 연예인들…… 이들에게 생명을 준 초, 하얀 초는 예수님이라고 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초들이 불을 밝힌 것처럼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다. 외모, 성별, 직위, 나이 상관없이. 어떤 이들은 처음에 종교적 열심을 내나 곧장 열정을 잃고 떠난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여 생명을 얻지 못한다. 불빛은 값없이 주어졌다. 이를 취할지 말지는 각각의 초의 선택이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스피치를 마무리하셨다.

 

“거리마다 집집마다 불빛을 밝히는 크리스마스 시즌, 우리 인생의 선물과 같은 예수님을 기억해봅니다. 나는 영원한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였는지, 혹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지 생각해보기를 바라며 값 없이 주신 생명을 취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버지의 스피치가 끝나고 우리는 선물교환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번호가 적힌 종이쪽지를 먼저 뽑았다. 선물에도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번호 순대로 선물을 받고, 그다음사람이 자신의 번호가 매겨진 선물을 받을지 아니면 앞전에 선물 받은 사람의 것과 교환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렇기에 뒷번호 일수록 유리한 선물교환식! 아쉽게도 다들 성품이 너무 좋으신 바람에 자신의 번호대로 선물을 받으시기만 하고 남의 선물과 교환할 생각을 하지 않으셔서 흥미진진한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어머니 차례가 됐을 때 약간의 다이나믹이 있긴 했다. 어머니께서 자신의 선물에 너무나 흡족해 하고 있는 분의 것을 뺏어왔기 때문이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가져가셨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크리스마스 이브 만찬. 얼마나 많은 가짓 수의 음식을 먹었는지 기억 나지 않지만 모두의 입가에 퍼진 미소, 그 미소 만큼 환했던 촛불, 어머니 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들 한가득 내 마음 속에 간직할 터다.

포아그라 캔. 바게뜨에 바르면 괜찮은 에피타이저가 완성된다
안에 치킨크림을 넣고 오븐에 살짝 굽는다
어머니가 소장하고 계시는 많은 피아노 악보들! 어머니는 베토벤을 좋아하신다고... 앗, 저도... :)
끝없는 후식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2016년 스위스/프랑스 여행 에세이, "따뜻한 겨울"!!!

겨울 시즌이 다가오는 만큼 그때의 추억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그때 적어뒀던 일기장과 사진첩을 다시 펼쳐봅니다.

그렇게 오늘, 그날의 한 장면을 살포시 띄워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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