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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따뜻한 겨울 (2016년 스위스, 프랑스 여행기)

환승역, 이스탄불 공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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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이스탄불공항

이스탄불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터키까지 장장 11시간 35분을 하늘 위에 떠있다가 드디어 발을 땅에 디뎌본다. 쑤시는 허리와 퉁퉁부은 발, 냄새가 진동하는 몸. 그러나 한국을 떠나면서부터 자유로운 나의 영혼. 동시에 책임감은 더욱 가중됐지만 나는 나 자신으로 호흡하고 나 자신으로 생각하며 나 자신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만 같았다.

공항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이스탄불은 어둠에 완전히 감싸져 있었다. 시침이 8시를 가리키고 있기에 저녁 8시로 생각했으나 아침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9시 쯤 되어 서서히 옅어지는 어둠을 보고서였다. '어두운 아침'. 서로 대치되는 단어의 배열이자 모순처럼 느껴지는 이 두 단어의 조합은 내가 한국에서 멀리, 한참 멀리 벗어나있다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스위스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영화를 봤다. 한 여자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정신을 잃었다가 깼는데 한 남자의 벙커에 납치당한 얘기다. 그 남자는 밖의 공기가 오염됐고 사고가 난 그녀를 자신의 벙커로 데려와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하는데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

요즘 이스탄불에서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지난 1월 1일, 이스탄불의 한 클럽에 총기난사테러가 있었고 12월에는 이스탄불 축구경기장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 44명이사망, 166명이부상을 당했다. 이스탄불 공항에서도 지난 여름 폭탄테러가 있었다.

"와, 벌써 수리를 다 해놨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수리라니?"

"여기 저번 여름에 테러 일어났던 곳이잖아."

모르면 용감하다고, 마냥 설레어있다가 쟌으로부터 이곳에 테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부터 겁이 나기 시작했다. 늘 살고 죽는 건 사람이 알 수 없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죽음의 실체가 가깝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내 생각 속에 존재하던 죽음이 내 옆에 바짝 다가와 앉아있는 것 같았다. 오금이 저렸다.

테러에 대한 화제는 '만약 내가 테러를 맞게된다면'이라는 주제로 넘어갔다. 신을 믿는내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면 하나님께서 남겨두신다.'라는 믿음이 있다.

"그럼 살아남긴 살아남았는데 팔 다리를 잃은 경우라면? 그땐뭘 할거야?"

극단적인 가정. 모든 극단적인 상황을 놓고 생각해봤을 때 여전히 나는 믿음을 지킬 수 있는가 생각해보라고 우리를 도전시키시던 교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거라나 뭐라나.

"그렇다고 해서 뭔가를 하는 건 아니고, 일상을 지속하는 거지. 사명이라는 건, 큰 일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주어진 신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니까."

어느새 비행기 탑승시간이 됐다. 제네바로 가는 승객들을 부르는 안내방송이 공항 내에 울렸다. 이스탄불에 아침 햇살이 찾아들어오기 시작할 때, 우리가 탄 비행기는 밝은 태양빛을 따라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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