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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편 스페셜] 여명 - 해외 입국자, 공항에서 집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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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춰 서기 전 유심칩을 갈아 끼웠다. 전원을 다시 켜자마자 문자가 떴다.

"안녕하세요. ㅇㅇ군 보건소입니다. 동대구역 도착 시간 이 번호로 알려주시면 됩니다."

불안한 시국에도 최선의 친절로 함께해준 승무원들께 작별 인사를 건네며 새벽 깔린 인천 땅에 살포시 발을 디뎠다.

비행기에서 나오자마자 검역에 들어갔다. 한국어로 '오염지역 방문자 신고'라고 쓰인 부스였다. 오염지역......? 단어 선택이 상당히 불쾌했지만 새벽부터 형광등 훤히 밝히고 꼼꼼히 일하고 있는 한국 사람들을 보자 고마운 마음에 나쁜 감정은 이내 가셨다.

오염지역 방문자 신고 부스에서부터 집까지 상당히 많은 서류를 작성하고 검사를 받아야 했는데 코스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1. 오염지역 방문자 신고 부스: 비행기에서 미리 받았던 두 서류, '건강상태 질문서'와 '특별검역 신고서'를 확인받고 열을 잰다. 신고서에는 이름, 주소, 국적, 생년월일, 항공기 편명, 한국 내 주소, 휴대전화, 출발 국가 및 도시명 등등을 기재한다.

 

2. 대기줄에서: 한 분이 (군인이었음) 자기 격리 어플을 설치했는지, 내용을 잘 기입했는지 확인한다

3. 사실 확인 부스: (군인 분들이 일하고 계셨다. 대한민국 육군 파이팅!!) 아까 그 두 서류와 어플에 등록한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내가 제출한 번호로 통화가 가능한지 체크한다. 본인 번호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로 전화를 걸어 신호가 가는지 확인한다.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4. 출입국 사무소 직전 부스: 격리 통지서를 작성한다.

5. 출입국 사무소 바로바로 직전: 작성한 격리 통지서를 확인해주시고 검역 확인증을 주신다.

6. 출입국 사무소: 격리 통지서와 검역 확인증, 여권을 보여준다. 내가 생각에 국민이라면 격리 통지서를 더 중요하게 보는 것 같다.

7. 입국장: 캐리어를 찾아서 입국장으로 들어가면 문 바로 앞에 또 담당자분들이 계신다. 여권이 있는지, 격리 통지서가 있는지 확인하고 보내준다. 다른 한 분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신다. 크게 서울 방면, 서울 외 방면으로 가는 사람으로 나뉘는데 최종 목적지에 따라 공항 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준다. 나는 광명역으로 가는 그룹으로 안내받았다.

8. 광명역팀: 어깨에 동그란 스티커를 붙여 광명역 가는 사람임을 표시한다. 그런 뒤 대기조에 합류할 수 있다. 번호가 붙어 있는 벤치에 순서대로 앉는다. 버스 탈 시간이 되면 '1번부터 24번까지 나오세요'라는 식으로 부른다. 나는 27번이라 아깝게 잘려버렸고 20분 정도 더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한 담당자분께서 "가는 길에 먹을 거, 마실 거 아무것도 없으니까 뭐 먹고 싶으면 저기 편의점 가서 뭐 좀 사드세요"하고 구수하게 알려주신다.

9. 버스 탑승과 기차 탑승: 버스에 지정된 좌석은 없으므로 승객과의 간격 정도만 고려하여 탑승한다. 광명역에 도착하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시는 분이 각 층마다 계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탑승구로 내려가 버스값과 KTX 값을 낸다. 그런 다음에는 또 검사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특별검역 신고서와 비슷한 내용을 작성한다. 이름, 주소, 생년월일, 출발 국가 및 도시, 자가격리 주소... 대충 이런 내용이다. 열차가 도착하면 철도 경찰이 우리 줄을 세운다. "두 줄로 서주세요!" 그러면 우리도 순종적으로 줄을 착착 서서는 철도경찰을 졸졸 따라 기차까지 간다. 지정된 칸에 탑승한다. 해외 입국자라 짐들이 다 많아서 경찰분이 도와주셨다.

10. 동대구역: 하차하면 또 담당자분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가 줄을 세운다. 이 분을 졸졸 따라 방역본부로 간다. 역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거리. 도착하면 새하얀 방역복을 입으신 분이 우리 캐리어와 가방에 소독약을 뿌리신다. 우리는 또다시 이 부스에서 특별검역 신고서 비슷한 내용을 작성한 뒤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간다. 나는 대구 거주자가 아니라서 거주지 보건소까지 앰뷸런스를 타고 갔다.

11. 담당 보건소: 격리통지서 확인을 받고 코로나 검사에 들어간다. 목젖과 코 깊숙한 곳에 면봉을 갖다 댄다. 코 검사는 생각보단 덜 아팠지만 불쾌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면봉이 빠져나오자마자 '으엑'이라고 해버렸다. 보건소 직원분께서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나와서는 내게 손소독제, 쓰레기봉투, 체온계와 마스크가 담긴 종이봉투를 건네준다. 이걸 들고 다시 앰뷸런스를 타고 집까지 직행.

 

철저한 검역에 혀를 내둘렀다. 정말 통제를 제대로 하는구먼. 부지런하고 변화에 민감하며 즉각 판단 및 실천이 가능한 곳, 대한민국. 그것이 우리나라의 특징이고 강점이다. 물론 행동이 빠른 만큼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했을 수 있고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에 피해가 갈 수도 있다. 어떤 부분은 필요 이상의 자원과 인력이 투입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위기상황에는 재빠른 판단과 즉각적인 실행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가 일처리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1년 동안 밖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보니 우리나라에서 유독 많이 하는 행동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는 숫자. 버스 대기석에 붙어 있던 숫자. 그 숫자를 부여받았을 때, '1번부터 24번까지 나오세요'라고 호명했을 때 갑자기 기억이 팽! 하고 달려 나가며 유년시절까지 도달했다. 우리는 이름이 있지만 부여된 번호로 종종 불리곤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서 당번을 정할 때, 수업시간에 발표할 사람을 정할 때, 체육 실기 시간에, 중간고사를 볼 때... 우리는 이름보다 번호가 먼저 불렸고 때론 그 번호가 있음으로 인해 이름으로 불릴 필요가 없었던. 그리고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그냥 잠시 그런 생각이 그쳤다. 개별의 존재보단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로 자라 온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그래서 그 번호가 비면 문제이지만 개인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도 번호만 잘 채우고 있다면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닌 듯.

그러나 참으로 다행이다. 대기석에 붙어 있던 숫자는 그야말로 좌석에 대한 설명이었지 나를 대체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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