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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프스코댁 다이어리

한국편 스페셜] 여명 - 한국행을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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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행 티켓을 샀다. 2, 3일 컴퓨터 앞에 종일 앉아 티켓을 알아보고, 안전수칙을 뒤지고, 항공사 코로나 수칙을 알아봤다. 비교하자니 끝이 없었다. 결국 루프트한자행을 끊었다. 8월 21일 금요일 아침 9시 10분 출발. 5일 남겨두고 끊은 티켓 치고는 가격이 괜찮았다.

 

타국에서 가장 힘든 때 중 하나는 가족이 필요한 순간에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일 테다. 

 

할아버지가 이 땅에서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은 내게 크나큰 충격과 슬픔이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비자문제로 고분군투하고 있었다. 말도 안되게 느리고 복잡하며 다소 책임감이 없어보이는 프랑스 행정과 씨름하며. 비자를 받긴 받았는데 인증을 할 수 없는 게 문제였다. 프랑스에서 장기체류 비자를 받으면 꼭 인터넷을 통해 인증을 해야한다. 어찌된 일인지 내 비자는 번번이 인증오류가 떴다. 여권에 떡 하니 붙어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이지? 비자를 발급해준 제네바 영사관에연락해보고, 홈페이지 담당자에게 연락해보고 프리팩쳐에도 연락해봤다. 영사관은 홈페이지 담당자, 담당자는 프리팩처, 프리팩처는 한국대사관으로 연락해보라고 했다. (한국 대사관은 왜...?) 그 어느 누구도 내 비자를 거절하는 웹사이트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다. 전화하고 이메일 보내는 게 일상이 됐다. 나중에 알고보니 올해가 윤년이라서 시스템에 오류가 난 거였다. 그러니까, 2월 29일 윤일이 있는 바람에 내 비자 유효기간이 365일이 아니라 366일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시스템이 자꾸 내 비자 날짜에 오류가 있다며 튕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문제를 겪는 사람이 비단 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소리. 그러면 좀 더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코로나네, 바캉스네 하며 미룰 일인가요?!

 

4월 중순, 할아버지께서 몸이 불편하시다 하여 병원에 들른다고 했다. 그땐 코로나가 한창 유행할 때라 걱정이 됐다. 깊은 산골짜기에 계셔서 전염우려가 없었으나 코로나는 우리 모두의 예상을 매번 깨고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검사 결과는 바이러스보다 충격적이었다. 폐암 말기. 4개월 생존 가능성. 담배도 피지 않으시는 할아버지가 폐암 말기라니.

"......!"

아빠와 영상통화를 하던 나는 굳은 듯 아무 말 하지 못했다. 터지려는 울음을 꾸욱 참았다. 지금 울면 아빠도 힘드시지 않을까.

 

심란한 날도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무뎌지는 듯 했다. 할아버지와 영상통화도 몇 번 했다. 부모님께서 작년 11월 말에 할아버지댁 근처로 이사하신 것이 참 다행이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부모님께서 함께할 수 있으니. 나도 덕분에 영상통화라도 할 수 있으니.

"할아버지는 좀 어떠세요?"

"할아버지 남매들 다 모여서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도 하러 가고 그래 잘 지냈다. 먹고 싶은 것 원없이 먹고 부지런히 댕기고... 재미있었지."

그나마 안심이 되는 얘기였다. 사실 할아버지는 말기암 환자 치곤 너무 건강하셔서 의사도 놀랐을 정도였다. 이미 손 쓸 수 있는 단계는 지났으니 남은 여생 편안히 하고싶은 것 하시다가 하늘나라로 보내드리자는 게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라. 성실하게 정직하게 그리 살면 돼. 돈을 위해서 살지 말고!"

화면을 통해 나와 우리 동생을 가만히 보고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그리 말씀하셨다. 평소 말이 없으신 할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꼭 하고 싶은 말. 인생의 끝자락에 꼭 들려주고 싶었던 말.

"네, 할아버지! 그동안 밥 잘 드시고 계세요! 저 곧 한국 갈게요!"

비자문제가 곧 해결되어 한국행 티켓을 조만간 구입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8월이 됐다. 8월은 바캉스철로 프랑스 전국민이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한국에 가기 딱 좋은 시기. 그러나 나의 비자는 아직도 감감무소식. 원칙적으로 비자 승인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출국을 할 수 없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안절부절하는 사이 할아버지의 건강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할아버지와 다시 통화했는데 다리가 너무 아프시다고 하셨다. 평생 아프다는 소리를 해본 적 없는 분께서.

"다리가 아프네. 걷기가 힘드네."

잔잔히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등 뒤로 할머니께서 눈물을 훔치셨다.

"밥은 잘 드시고 계세요?"

"죽도 못잡수시고 내킬 때마다 밥알만 요래요래 한 숟갈, 두 숟갈씩 드신다."

할머니가 대신 대답을 하셨다.

할아버지의 마지막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위를 꽉 쥐어짠 듯 아파왔다.

"언제 오노?"

할아버지가 물으셨다. 나는 비자얘기를 하며 당장 갈 수 없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한참 울었다. 신랑이 말 없이 꼬옥 안아주었다. 많이 둔감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괜찮다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거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 땅에서의 헤어짐은 결코 쉽지 않구나. 할아버지와 함께하지 못할 앞으로의 시간이 참 긴 것 같아서. 그의 공백이 벌써 마음에 사무치는 것 같아서. 그와 동시에 내가 할아버지를 참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에 퉁퉁 부은 눈으로 생각을 하다가 아무래도 한국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인증절차에 오류가 있지만 일단 비자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한쪽 눈을 감았다. 점심 쯤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한국으로 가려고 하니 공항에 마중을 와달라고 부탁하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대화가 잘 되지 않았고 다소 무뚝뚝하고 표현이 거치신 우리 부모님이 (갱상도 갬성), "오지 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코로나도 그렇고 비자도 불확실하다며... 그냥 오지 마. 무리해서 올 필요 없어. 터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휴대폰을 바로 내려놓고 입을 꽉 틀어막았다.

"그래, 무리해서 올 필요 있나."

동생들이 한 마디씩 거드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속상했고 감정적으로 주체가 안되어 결국 화장실로 달려갔다. 울고 또 울어도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 자택근무를 하고 있는 신랑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울려고 애썼다. 그러나 들썩임이 심해 결국 신랑이 들은 모양이었다. 그가 조용히 다가와 나를 안아 주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가족들은 내가 한국에 가기를 원치 않는다고 속상하다고 하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신랑이 말했다. 하루 기다렸다가 내일 다시 연락해보라고. 내가 가고싶어하는 걸 다들 알게 되었으니 생각할 시간을 가족들에게도 주라고. 분명 내일은 내가 한국가는 것에 대해 반기실 거라고. 나도 생각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듯 싶었다. 솔직히 모든 것이 너무 불안한 상황이었다. 코로나도 재확산되고 있는데다가 비자문제는 진척이 없다. 마음이 반쯤 기울었다. 할아버지와의 이별을 준비하자고. 직접 보지 못할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자고. 할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할아버지 얼굴이 잘 나온 사진을 보며 초상화도 그렸다.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도화지에 선을 하나하나 옮기려 할 때마다 초점이 흐릿하여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우편으로 보내려던 걸 직접 들고오게 될 줄이야!

 

그렇게 하루를 조용히 보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비행기표를 알아봤다. 가격을 비교하고, 항공사별 안전수칙을 알아보고... 개인적으로 에티하드항공을 좋아하는데 경유시간이 무려 21시간이나 됐다. 코로나테스트 확인증도 있어야했다. 프랑스는 한국처럼 코로나 테스트를 쉽게 받을 수 없는데... 다른 항공사를 알아봤다. 한참을 뒤지다가 마침내 루프트한자로 결정했다. 다행히 금요일 출발하는 비행기가 있었고 가격도 790유로로 적당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가족들에게 다시 전화했다. '티켓을 끊었어요'라고 하기도 전에 부모님께서 '한국에 온나'라고 대화의 운을 띄우셨다. 어째, 신랑이 말해준대로네! 나보다 우리 부모님을 더 잘 아는 것 같다. 정말 그 사이 생각을 하셨는지 마음이 바뀌어 있었다. 할아버지도 부모님과 함께 계셨다. 실내였는데도 배레모에 셔츠를 걸치고 계셨다. 나에게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으신 듯. 한국에 가기로 결정했다고 하자 환하게 웃으셨다. 할아버지도 나를 많이 사랑하시는구나.

"오면 하루 죙일 얘기하제이."

할아버지 고향 마을도 둘러보자... 맛있는 것도 먹자...

 

마음이 설렜다.

 

나의 얼굴이 그렇게 환해보이는지 신랑이 그런다. 참 행복해 보인다고. 한참 행복하게 짐을 싸다가 문득 신랑을 봤는데 아차. 우리 한 달이나 떨어져 있어야돼. 결혼하고 오랫동안 떨어져있기는 이번이 처음이 될 것이다. 한 달. 신랑 없이 나 홀로. 신랑도 나 없이 한 달. 기분이 묘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고 싶어 떠나는 길이지만 사실 내일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지 않은가. 한국으로 가는 길에 내가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신랑이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괜한 걱정이긴 하지만 내일을 모른다는 지점에서 나는 숨이 멎는 듯 했다.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오늘, 바로 이 순간뿐인 것을. 그 뻔한 얘기가 심장으로 이해되기는 처음이다.

 

신랑을 수시로 껴안았다. 집 청소도 하고 냉장고에 음식도 몇 칠 분량 넣어두었다. 신랑도 나를 꼬옥 껴안아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머리뽀뽀'도 자주 해줬다. 

"한국에 자주 갔으면 좋겠네."

평소보다 더 잘하는 나를 보며 신랑이 눈을 찡끗했다.

 

출입국 심사를 받을 때 문제가 없도록 혼인증명서, 거주증명서, 비자 관계자와 주고받은 이메일 등등을 신랑이 프린트해줬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일단 비자가 너한테 있고 시스템 상에 문제가 있는 거기 때문에 아무 불이익도 없을 거야. 할아버지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아서 가족 방문을 하는거라고 설명하면 될거야."

신랑이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해주자 나도 안심이 되는 듯 했다.

 

 

- 다음편: 내일 자정 업로드 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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