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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프스코댁 다이어리

한국편 스페셜] 여명 - 자가격리자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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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 반. 느지막이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벌써 시차 적응을 한 건가? 

어제 오후 4시가 되어서 졸음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신랑의 전화에 깼다.

"뭐 하고 있었어? 뭐? 자고 있었다고? 안돼! 그럼 밤에 못 자잖아!"

그래도 감기는 눈은 어쩔 수가 없는걸. 신랑과 통화를 하면서도 꾸벅꾸벅 졸다가 통화를 끝내고 다시 잠들었다. 그래도 배꼽시계는 워낙 정확해서 저녁을 먹기 위해 일어났고 다시 잠들지 않으려고 두 눈을 치켜뜨고 있다가 도저히 못 버티겠어서 8시 반에 잠들었다. 자정쯤 쏟아지는 빗소리에 한 번 깼을 뿐 완전 숙면.

그리고 아침이 된 것이다.

 

나는 부모님 댁의 맞은편 건물에 머물고 있다. 예전에 아빠가 홈스쿨 공동체를 운영하시던 곳으로 말하자면 학교 건물이다. 나도 이곳에서 십 대 후반기를 보냈다. 내 삶의 한 자락이 보관되어 있는 소중한 곳.

아빠가 직접 구우신 빵과 내린 커피, 우유를 갖다 주셨다. 전에 영상통화할 때 자랑하시더니 음! 그럴 만 하구나! 곡물과 건포도가 들어가서 고소하고 풍미가 좋았다. 그런데 빵이 한 두 조각이 아니라 한 덩어리다. 이번 주 내내 먹으라고 이만큼 갖다 주신 거겠지...?

아침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하루를 시작했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책 정리를 시작했다. 홈스쿨 공동체를 할 때 쓰던 문제집이 굉장히 많았다. 과목별로, 학년별로, 수준별로. 건물을 한동안 비워놓다보니 곰팡이도 여기저기 꽤 쓸어있었다. 우리가 앉아 공부하던 의자는 완전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버릴 것이 많았다. 이곳에 생기를 다시 불어넣을 필요가 있었다.

책 정리를 한참 하다보니 오후 1시였다. 부모님이 배달해주신 점심을 급하게 먹었다. 1시 반에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위스로 떠나기 전 다니던 교회의 청년부에서 라이브톡을 한다기에 참여하고 싶었다. 보고 싶은 얼굴이 많았다.

 

그렇게 예배가 끝나고 책정리를 조금 더 하다가 피아노를 좀 치다가. 다시 책정리를 하려던 참에 물감을 발견했다. 10년도 더 됐을 물감이 서랍 안에 들어있었다. 붓도, 포스터용 물감도, 스케치북도. 내가 쓰던 것, 동생이 쓰던 것, 누가 두고 간 것 모두 한데 뒤섞여있었다. 미술 도구를 예쁜 바구니에 정리를 해놓은 뒤 그림을 그리기 위해 폼을 잡았다. 

'그림이나 그려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재미가 있어 밤 12시가 다 되도록 그림을 그렸다. 잘하는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것이 많은 나는 뭔가 하나에 꽂히면 이렇게 밤을 맞이하도록 매달리는 편이다. 그래도 밤이 늦었으니 자려고 누우면 미처 꺼뜨리지 못한 온기가 내 마음을 계속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렇게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하던지 아니면 다시 불을 켜고 앉아 하던 걸 계속한다. 이런 상태가 이 삼일 정도 지속되다가 흥미를 금세 잃는다. 글이든, 피아노든, 그림이든. 이래서 뭐든 다 아마추어다. 가끔은 그냥 하나만 죽어라 파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만 그것도 성격상 어려운 듯싶다.

아무튼, 오늘 나는 수채화의 매력에 빠졌다. 10살 때 억지로 미술을 배울 땐 그렇게 싫고 재미가 없었다. 물감을 도화지에 풀어내는 게 어려웠다. 색을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미술 선생님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제를 꼭 갖다 주며 연습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줄곧 나는 수채화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연필로 그리는 건 꽤 자신 있는데 말이다. 수학 시간, 공책이며 교과서며 모퉁이마다 낙서를 했는 데다가 좋아하는 만화책 그림을 벳겨 그리곤 했다. 나중에는 팬심으로 레골라스 분장을 한 올란도 블룸과 김수현을 그렸다. 인터넷에서 본 입체 그리기가 너무 신기해서 한창 따라 했다. 연필그림은 재미있다. 손에 착 감겨서 샥샥샥 소리를 내며 한 겹 한 겹 나타나는 모습이. 짙은 명암, 가는 선, 부드러운 질감 모두 연필 하나로 구현할 수 있는 게 매력이다.

물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붓을 집어 들었다. 제네바의 벼룩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많은 그림들, 친구네 집에 걸려있는 그림들... 지금까지 본 그림들이 나에게 손짓하듯. 물에 색을 타서 풀어내기만 하면 된다는 듯. 그동안 싫어했던 수채화가 오늘은 왠지 쉽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붓을 들고 물을 엄청 묻혀 물감을 찍었다. 그리고 종이 위에 놓았는데 물을 타고 색이 연하게 번지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대충 마음 가는 대로 덧칠하고 다른 색을 입히고 하며 프랑스 집 근처 밀밭 풍경을 종이 위에 옮겼다. 그리 나쁘지는 않았는데 문제가 있다면 구름. 하얀색을 써보고 파란색을 아주 묽게 해서 테두리를 그려봤는데 생각처럼 구현이 안됐다. 결국 유튜브를 찾아봤다. 오! 구름도 기가 막혔지만 자연을 채색하는 놀라운 기법들이 주르륵 나왔다. 결국 처음 그린 그림을 스케치북에서 찢어내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같은 장면이지만 이번엔 유튜브에서 본 대로 한 번 해보리라.

그렇게 밀밭을 끝내고 그다음엔 부모님을 그리고, 해가 뜨는 새벽 풍경을, 나를 닮은 한 여인을... 그림 네 점, 찢은 것 까지 총 다섯 점을 그렸다.

 

허리며 목이며 팔까지,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붓을 씻고 대충 방을 정리했다. 내일 또 그려야지 생각하며 물감통들은 다 그대로 뒀다. 하루가 좀 더 길었으면, 몸이 덜 저렸으면 좋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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