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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프스코댁 다이어리

한국편 스페셜] 여명 - 할아버지와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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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격리를 하고 있다가도 

익숙한 집안 풍경에 마음이 평안하다가도 

내가 지금 한국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드문드문 모든 상황이 낯설게 느껴지며

'와- 나 진짜 한국에 온 거야?' 하고 놀라곤 한다.

 

솔직히 어떤 이들은 부모님도 아니고 할아버지께서 아프셔서 한국까지 오는 게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할아버지와 많이 가까웠니?"

생각해보면 나랑 할아버지랑 그렇게 대화를 많이 하는 사이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나를 살갑게 대해 주신 것도 아니다. 과묵한 우리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는 물론이고 자식들과도 대화가 많지 않으셨다.

나도 모르겠다. 왜 할아버지를 이토록 좋아하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면 할아버지께서 어린이집 행사 때 오신 적이 있다.

나는 당시 미운 7살의 시기를 정통으로 지나고 있었다. 삐쟁이, 심술쟁이, 떼쟁이, 고집쟁이. 매일마다 가동되는 엄마의 한숨 공장.

그 날은 '아빠와 함께하는 하루' 뭐 그런 행사였다. 당연히 나는 아빠가 오실 것을 기대했는데 아빠의 직장이 어린이집 바로 옆이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전도사님이셨고 어린이집은 아빠가 섬기는 교회 부속이었다.

그러나 아빠는 오시지 못했다. 대신 할아버지가 오셨다. 어린 내 동생의 손을 잡고 찾아오셨다.

그때는 아빠가 오시지 않았다는 사실에 혼자 너무 화가 나 있어서 행사를 즐겁게 보내지 못했다. 분명 할아버지와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 틈에도 기억나는 것 한 가지는 할아버지와 율동을 하던 장면이다. 무슨 노래인지는 몰라도 허리를 이쪽저쪽으로 흔들며 두 손을 빙글빙글 돌리는 동작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열심히 율동하시던 장면이 기억난다. 허리를 이쪽저쪽으로 흔들며… 그리고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교실로 들어가서 뭔가를 만들기도 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와 손을 잡고 (반대편에는 동생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행진을 했던 것도 같다…

 

사실 할아버지는 내 동생을 끔찍이 사랑하셨다. 그건 눈에 보이는 사랑이었기에 할아버지가 우리 삼 남매 중 둘째를 가장 예뻐하신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섭섭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나는 할아버지가 좋았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좋았다. 그리고 나도 할아버지가 내게 사랑을 표현해주시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내가 7살 때까지 우리와 함께 사셨다. 그리고 어린이집을 졸업할 무렵에 지금 거주하시는 이 산골짜기로 귀향하셨다. 그래서 매년 방학은 할아버지 댁에서 보내게 됐다. 휴가철, 자가용을 타고 그 먼 길을 가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고속도로가 발달하지 않아 부산에서 이곳까지 5시간씩 운전해야 했다. 지금은 3시간 반이면 갈 거리를. 동생들이랑 장난치다가 엄청 싸우다가 지쳐서 잠을 자다가... 그렇게 힘겹게 도착하여 일주일 정도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친척끼리 휴가시기를 맞춘 건지 아니면 보통 그때 다 휴가인 건지 아무튼 사촌과도 실컷 놀 수 있는 때였다. 할아버지 집에는 그런 추억이 많다. 큰엄마 잔소리 듣던 기억, 사촌들과 밤새 이야기하고 놀던 기억, 시원한 계곡에 물놀이 가던 기억... 그래서인지 할아버지 댁에 가는 걸 좋아했다.

12살쯤에는 할아버지께서 운전면허증을 1종으로 따셔서 우리 집까지 트럭을 몰고 오시곤 했다. 농산물을 직거래로 판매하신 뒤에 우리 삼 남매를 데리고 시골로 돌아오셨다. 그렇게 우리의 방학이 시작되는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면허 따실 때 얼마나 멋져 보이시던지. 할아버지의 끝없는 도전이 내게 큰 감동을 줬던 듯하다. 한 번에 합격을 하시고 위풍당당하게 걸어오시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시골에 가는 것도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여전히 할아버지와 대화는 하지 않지만. 할아버지는 우리 셋을 태우고 가는 여정을 무척 좋아하셨다. 우리 집에 오셨을 때 함박 미소, 우리를 차에 태우고 가며 또 함박 미소. 감정 표현이 많이 없으신 분이지만 번지는 미소를 어찌 감추랴. 여전히 우리와 대화는 없으셨지만.

할아버지와 내가 나누는 대화는 말없이 손에 쥐어주시는 사탕이나 젤리 혹은 아이스크림이었다. 내가 어렸기도 했고 할아버지께 다가가는 방법을 몰랐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셨을 테다. 내게 말을 거시는 경우는 그저 '물 좀 갖다 다오'.

그 당시 할아버지 댁 화장실은 푸세식이었다. 꼬마였던 우리 삼 남매가 변을 보다가 변을 당할 것 같은 곳. 그래서 응가가 마려우면 동생들은 흙마당에다가 실례를 하고 할아버지께서 삽으로 퍼다가 거름더미에 치워놓으시곤 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너무 멀게 느껴지고 변을 치워달라고 하는 게 무척이나 부끄러워 응가를 도저히 못 참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마당에다 변을 봤다. 그런 다음 할아버지께 말씀도 안 드리고 내 변이 발견되어 치워 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식사시간이면 밭에서 일하시는 할아버지를 부르는 건 내 담당이었는데 그때도 부끄러움이 너무 많아 나가기 싫어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서먹하고 낯선 사이였는데 10대 중반이 되며 관계가 많이 바뀌었다. 당시 두루두루 사귐성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되어 어른 대하는 법을 좀 배운 것 같다. 조금씩 두려움이 없어진 나는 조부모님께 곧잘 안부를 묻고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도 나를 더 편하게 대하셨다.

언제가 부터는 포옹도 서슴지 않고 해 드릴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많이 없으셨지만. 할머니는 말씀을 재미있게 잘하시고 사연도 워낙 많으셔서 "내가 옛날에~"하며 술술 재미난 얘기를 잘 풀어내신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한 날은 동생들과 할아버지 그리고 나 다섯 이서 방에 남게 됐다. 아무도 말이 없어 어색함만이 흐르던 그때, 내가 할아버지께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할아버지 옛날이야기? 음..."

이런! 할아버지는 당황하셨는지, 기억을 더듬고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무 말이 없으셨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기를 한참. 밥 먹으러 오라는 할머니의 샤우팅에 이 때다 싶어 전원이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는......

 

2015

 

그런 할아버지도 마지막 때가 다가오니 당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으신 듯하다.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당장 올 수 없어 갈팡질팡하며 할아버지와 영상통화를 했을 때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마지막이 오기 전 할아버지의 인생을 최대한 많이 담아두고 싶어서 여러 질문을 했다. 할아버지의 고향에 대해, 가족에 대해, 할머니와의 만남에 대해...... 나는 전에 그 기나긴 침묵이 생각나서 이번에도 그러시는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오히려 할아버지께서 그런 질문을 반가워하셨다. 말씀해주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질문에 긴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이 말씀을 하셨다.

"한국에 오면 밤이 새도록 이야기하자. 할아버지 고향 마을에도 가보자."

할아버지는 나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하셨다. 그리고 그동안 간직해왔던 삶을 물려주고 싶어 하셨다.

 

다음 화에 계속: 내일 자정 업로드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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